방학까지 71일 남은 오늘의 괴담

내가 악마를 처음 만났던 건 17살쯤 됐을 때였고 그놈이 내 목숨을 구했어.

근로학생 알바 끝나고 집에 가려고 버스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필 우산을 안 가져온 날이었어.

늘 그렇듯이 우산 안 가져온 날엔 꼭 비가 오지. 그날도 장대비가 엄청나게 쏟아져서 거의 발목까지 물이 찰 정도였어.

그러다 갑자기 비가 딱 내 머리 위만 멈추는 거야. 올려다봤더니 거기 그놈이 있었지. 그놈이 내 머리 위에서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어.

그놈은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말만 듣고 빚어만든 몰골을 하고 있더군.

최소 2m는 될법한 키를 해가지고선 비쩍 말라비틀어진 몸매에 구부정한 어깨가 무슨 독수리같은 꼴이었어.

얼굴은 또 살점이라곤 없고 뼈만 앙상해서는 살이 있어야 할 곳은 죄다 푹 꺼진 와중에 정말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어.

뻐드러진 회색 이가 다 보이도록 환한 미소를 말이야.

"자네 이야기 못 들었나?" 그놈이 묻더라고.

"뭘?" 내가 대꾸했지.

그러니까 그놈이 받아치더라고. "오늘은 버스 운행 안 한다네. 운전사가 이 날씨에 음주운전하다 꼬라박았거든. 승객은 전원 사망했고."

명랑하다시피한 어조로 말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다 뒤집힐 것 같았어.

그놈 말을 믿을지 말지를 떠나서 당장 이 자리를 뜨고 싶었어. 최대한 이새끼랑 멀어져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거든.

"어....그럼 오늘은 걸어가야겠네." 내가 말했어.

"그래, 그러는 게 좋을 걸세." 그놈이 그러더군. "자, 여기 우산 가져가게나."

그리고선 쓰고 있던 우산을 내게 넘겨줬어. 아무 생각도 없이 우산을 받아들었고 손끝이 스쳤는데, 스쳤을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

다음날 아침 뉴스에서 버스 전복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봤어.

그런데 내가 타려던 정거장 바로 다음에 사고가 났다고 하더라. 그놈 말대로 승객 전원 사망이라고 했고.

만약 그놈 말을 무시하고 그 버스를 탔다면 나도 죽었겠지.

그 다음으로 악마를 봤던 건 내가 대학교 2학년일 때였어.

내 기숙사 방에서 수그리고 앉아 아무렇게나 뒤져서 꺼낸 내 책을 읽고 있더라고.

"왔구나." 내가 말했어.

"그래, 내가 왔다네." 그놈이 지껄이더군.

그리고는 책을 덮고 내게 또 환하게 미소를 지었어. 그놈의 거지같은 회색 뻐드렁니가 가득한 미소를.

"오늘은 선물을 가져왔다네."

또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어.

"어, 그래?"

"아주 좋아할걸세." 그놈이 대꾸했어.

그러고는 재킷 속주머니로 손을 뻗더니 핑크색 스프링제본 노트를 꺼내더라.

표지에는 가지런한 글씨로 "엘렌 하트웰"이라는 이름이 쓰여있었어.

"심리학 수업 같이 듣는 예쁘장한 갈색 머리 아가씨 거라네." 그놈이 마냥 떠들어댔어.

"자네 맨날 그 아가씨를 쳐다만 보지 않았나. 이거 두고 가지 않았냐고 하고선 저녁약속을 잡아보게."

그러고는 책상에 노트를 얌전히 올려뒀어.

"어....고마워."

"감사는 넣어두게나. 다음에 또 다시 봄세."

그리고 눈 깜박할 새에 소리 하나 안 내고 사라져버렸어.

마지막으로 악마를 본 건 아들을 가졌던 날이야.

이런저런 일을 겪고서 엘렌은 내 부인이 됐고, 난 후딱 씻고 나가서 아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지.

빨리 닦고 나갈 마음으로 샤워부스를 나오자마자 그놈이 서있었어. 젠장,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꼴이었는데.

"잘 지냈나? 나일세." 그놈이 말문을 떼더라.

"깜짝 놀랐어."

"아 뭐 그럴만도 하지. 그건 그렇고, 자네 잘 듣게나. 오늘 자네는 아버지가 될거야. 아들일 걸세.

아내는 본인 몸 상태를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오늘이 바로 그 날이란 말일세."

내가 아버지가 된다....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었지만 이놈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불편했어.

"근데 도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야?" 내내 궁금했던 걸 물어봤어.

그놈은 그저 입이 찢어져라 웃더라.

"아, 운명이란 게 어떻게 흘러갈 지 모르는 거 아닌가. 자네 눈에는 안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더니 회청색 연기만 남기고선 사라져버렸어.

그 뒤로 다시는 그놈을 보지 못했지만 이따금 불현듯 그놈이 한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했어.

하지만 그것도 몇년 지나고, 수십년 지나고 나니 점점 잊게 됐어.

경찰이 내 집 문짝을 찢어발기며 들이닥치기 전까진 말이야.

그들은 경찰견 수십마리와 온갖 굴삭장비를 대동해 들어오더니 내 집 안팎을 송두리째 들었다 놨어.

그리고 여성의 유해 37구를 발견했다며 내 하나뿐인 아들을 체포했어.

재판 내내 아들은 "악마의 사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지만 검사 측에선 그 말을 믿어주질 않았어.

마침내 내 아들은 사형을 구형받게 됐어.

하지만 난 알아. 내 아들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었어.

수백 수천개의 연습장 페이지에 똑같이 그려진 얼굴이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살점이라곤 없고 뼈만 앙상해서는 살이 있어야 할 곳은 죄다 푹 꺼진 와중에 정말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얼굴이.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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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요 괴담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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